국내 문단에서 비중 있는 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부천 수주문학상 공모전’에서 시흥고등학교 교사 임경묵 시인(37세)의 서사시 ‘질경이의 꿈’이 올해(제8회)의 대상으로 뽑혔다. 시흥 문학인이 국내 유명 문학상의 대상에 당선된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수주문학상’은 ‘논개’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부천시의 후원 하에 기성·신인을 망라한 전국 문인을 대상으로 공모된다.
‘수주 변영로’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그의 술과 관련된 호방한 기행과 함께 뜨거운 민족혼과 감동을 느끼게 하는 불후의 명시 ‘논개’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변영로의 ‘논개’ 중에서)
수주(樹州·나무고을)는 경기 부천 오정고을의 옛 이름이다. 지금의 부천시 고강본동에는 변(卞)씨 문중의 선산이 있으며 이곳에 변영로와 형제들, 부모와 조부모의 묘가 있다. 변영로의 아호 수주(樹州)는 조상이 500여년 살아온 고향 이름이다. 변영로의 형제들 역시 모두 두드러진 인물들로서, 큰형 변영만은 우리나라 국학계의 거두로 꼽힐만큼 유명한 국학자이자 약관에 법관에 오른 인물이고, 영문학자인 둘째형 변영태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변영로도 광복 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대한공론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변영로는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기 전부터 ‘천재시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 언론에 알린 장본인이 다름 아닌 변영로이기도 했다.
‘논개’는 1924년 발간된 시집 ‘조선의 마음’에 수록됐다. ‘논개’ 뿐만 아니라 시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민족적 색채가 짙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집은 출간되자마자 일제에 의해 판매금지 및 압수령이 내려졌다.
동아일보가 발간하던 여성지 ‘신가정’의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변영로는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돼 총독부의 압력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신가정’ 표지에 손 선수의 다리만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여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변영로는 1961년 6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평생을 술과 함께 하면서 번뜩이는 예지와 해학과 풍자 넘치는 저항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어느 단체인가에서 각계 인사들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우리나라 주선(酒仙) 10걸’ 가운데 등재될 정도로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했던 당대의 기인재사(奇人才士)이자 호남아였다.
변영로 시인이 술과 시에 취해 살다간 자신의 얘기를 담은 ‘명정(酩酊) 40년’을 보면 그는 이미 대여섯 살 때 술독에 기어 올라가 술을 훔쳐 마신 천부적인 모주꾼이었다. 어느 날 그는 성균관대학 뒷산에서 공초 오상순, 성제 이관구, 횡보 염상섭 등 당대의 국가 대표급 괴짜 악당(?)들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대취한 네 사람은 문득 술잔에 빗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허! 이거 낭패로다”
그들은 취한 김에 네 사람 모두 젖은 옷을 속옷까지 몽땅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채 앉아서 남은 술을 마저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침 근처에 메어 있던 소를 잡아탔다. 비 내리는 대낮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네 사람이 벌거벗은 채 인사불성일 정도로 취해 소를 타고 나타난 모습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변고’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나가던 여인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 경관이 뛰어오고 소동이 일어났음은 불문가지다.
나라 없는 울분과 시대의 아픔을 술과 기행으로 삭이고 저항했던 이 땅의 당시 지식인들이 오늘의 시대를 다시 산다면 어떤 글을 쓰고 어떤 해학과 풍자를 쏟아낼지 궁금하다. 제8회 수주문학상 대상에 당선된 시흥 문학인 임경묵 시인의 작품세계에서 수주 변영로 선생의 기개와 시 정신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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