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추석 명절에 한바탕 북새통을 치르면서도 가슴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 행렬로 ‘민족 대이동’이 벌어지는 풍경은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삭막한 도시에서 살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남루한 어머니와 늙은 아버지의 검게 탄 주름진 얼굴, 그 슬프고 한없이 포근한 품이 기다리는 고향집, 어린 시절 뛰놀던 마을의 느티나무며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늘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고향은 영원한 모태(母胎)요 정신적 삶의 뿌리이자 그리움의 마지막 대상이다. 자동차 행렬이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어도 추석 명절이면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가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올 추석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풍경도 앞으로 10~20년 후면 사라질지 모른다. 고향 마을에는 빈집이 늘어가고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70세가 넘는 곳이 태반이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우리의 고향 마을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우리는 뿌리와 고향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40년 전인 1966년 한국의 농촌 인구는 1,540만명으로 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약 340만명으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 사라져가는 것은 비단 고향 뿐만이 아니다.
추석에 고향을 찾아가는 관습은 본디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묘를 성묘하기 위해서 시작됐다. 우리 민족은 연중 명절 때마다 차례를 지내고 또 성묘하는 빈도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았다. 옛날에는 사시사철 네 번 성묘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봄에는 청명에, 여름에는 7월 보름날인 중원(백중)에, 가을에는 추석에,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하고 무덤 위의 눈을 쓸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5월30일 메모리얼 데이에,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정교의 부활절에, 이슬람권 나라들에서는 라마단을 전후하여 꽃을 바치고 성묘를 한다. 거의 모든 나라들이 대체로 1년에 한번 성묘하는 게 상식이요, 그나마 아예 성묘를 하지 않는 나라가 성묘하는 나라보다 더 많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성묘 횟수가 많은 것은 한국인 특유의 휴머니티(인간성)와 모럴(도덕성)의 결정체랄 수 있는 ‘孝 사상’에 근거한다. 우리 민족의 가치관이나 가치체계를 정립하는 데 孝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孝가 사람으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임에는 동서를 불문하고 다름이 없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양에서도 孝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친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효 사상은 어느 타 민족에 비해 단연 두드러진다. 핵가족화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에 와서도 孝는 한 개인의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볼 필요도 없이 그 사람 됨됨이가 나무랄 데 없다. 어느 재벌그룹 총수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실력이나 능력보다는 면접을 통해 부모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최대한 알아보려 한다고 한다. 효도가 극진한 신입사원은 반드시 회사를 크게 이롭게 하는 큰 일꾼으로 성장한다는 경험에서 얻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쁜 전통은 속박이 되지만 좋은 전통은 우리의 역할모델이 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 난을 겪은 후 조선은 무너진 국가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예(禮)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예치(禮治)’를 국가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禮가 정치문제가 되어 마침내 나라의 혼란과 무너진 국가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禮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孝였다. 이처럼 孝는 비단 개인과 가정의 모럴에 그치지 않고 치국평천하의 한 중요한 가치로도 역할했던 것이다.
노인문제가 갈수록 중대한 사회문제로 부각돼가고 있는 지금 고향을 찾은 자식들이 부모에 대한 孝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추석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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